Voices from China · 中国语 이야기
볼보가 ‘워월워’가 되는 나라,
중국어에 V 발음은 애초에 없습니다
베니스를 ‘웨니스’라 부르고, 동료 ‘비타’를 ‘위타’라 불러야 알아듣는 곳. 중국어에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V 소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직접 살아보지 않으면 절대 모르는, 발음이 만들어내는 작은 문화 충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중국에서 일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발음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분명히 또박또박 말했는데 상대방의 표정이 점점 흐려질 때, 그리고 그 단어 안에 알파벳 V가 들어 있을 때. 그때부터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대신 그 자리에는 부드러운 ‘ㅇ(W)’ 소리가 들어섭니다.
CHAPTER 01 볼보를 발음할 수 없는 사람들
상하이 출장길, 홍차오공항(虹桥机场) 근처에 있던 볼보 충전소에 서서 택시를 부른 날이었습니다. “지금 볼보 충전소 앞에 있어요.” 그렇게 위치를 알려주는데 기사님이 도무지 ‘볼보’라는 단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외래어를 말하기 전 반드시 중국식 발음을 사전에 체크하는 것이 거의 의식 같은 습관인데 (중국에서는 외래어 발음 체크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하필 그날따라 마음이 급해 그 과정을 통째로 건너뛰었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결국 택시는 엉뚱한 곳에 도착했고, 저는 제가 서 있는 자리를 다시 한참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중국에서 볼보는 ‘볼보’가 아니었습니다. 표기는 沃尔沃(wò’ěrwò), 발음은 ‘워얼워’. V 발음이 통째로 ‘ㅇ’으로 바뀌어 있던 것입니다. 그날의 작은 헤프닝은, 중국어의 음운 체계를 몸으로 배운 첫 수업이 되었습니다.
이건 볼보 한 회사만의 사정이 아닙니다. 이탈리아의 낭만적인 도시 Venice는 중국에서 ‘웨니스’가 됩니다. 威尼斯(wēinísī), 즉 ‘웨이니쓰’라고 표기되기 때문입니다. 비타민(Vitamin)은 维生素(wéishēngsù), 우리 귀에는 ‘웨이셩쑤’. 비자(Visa)는 维萨로, 역시 ‘웨이싸’. V로 시작하는 모든 외래어가 입을 통과하는 순간 깨끗하게 ‘ㅇ’으로 변신합니다.
CHAPTER 02 ‘비타’가 아니라 ‘위타’라고 불러야 합니다
이 현상은 회사 생활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 중에 영문 이름이 Vita인 친구가 있는데, 한국식으로 ‘비타’라고 부르면 정말 단 한 명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결국 발음을 ‘위타’로 바꾸자 그제서야 모두가 “아, 维塔(wéitǎ)!”라며 활짝 웃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 친구 본인조차 자기 이름을 한국식으로 ‘비타’라고 발음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알파벳으로 V-I-T-A라고 분명히 적혀 있는데도,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어김없이 ‘위타’입니다. 모국어의 음운 체계는 이렇게 무섭습니다. 없는 소리는 들리지도, 발음되지도 않습니다.
CHAPTER 03 ‘월남’이라는 이름의 비밀, 한국어 속에 잠든 중국식 V→ㅇ
중국에서 살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평생 써오던 한국어 단어 하나가 새롭게 보이는 순간이 옵니다. 저에게 그 단어는 바로 ‘월남(越南)’이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부를 때의 발음은 ‘비엣남(Việt Nam)’입니다. V 발음이 또렷하게 살아 있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중국 땅을 지나가는 순간, 어김없이 V는 사라집니다. 중국어 표기 越南의 발음은 ‘유에난(Yuènán)’. ‘비엣’의 V가 통째로 ‘유’로 바뀌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정말 흥미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한국어에서 우리가 익숙하게 부르는 ‘월남(越南)’이라는 이름, 그것이 사실은 베트남의 원음이 아니라 중국식으로 한 번 걸러진 결과라는 점입니다. 중국이 음차한 한자 越南을 한국식 한자음으로 다시 읽은 것이 바로 ‘월남’이지요. 비엣남(원음) → 유에난(중국식) → 월남(한국식 한자음). V가 ‘ㅇ’으로 바뀌는 그 흐름이, 이미 우리 어휘 속에 화석처럼 박혀 있던 것입니다.
중국이 V를 ‘ㅇ’으로 바꿔 부른 흔적이, 한국어 속에 그대로 굳어진 결과입니다.
이 사실을 책에서가 아니라 중국 땅에서 몸소 깨달았을 때의 그 묘한 기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월남쌈’이 베트남 음식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그 ‘월남’이라는 두 글자에 중국어의 음운 규칙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은 중국에 살아본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작은 비밀처럼 느껴졌습니다.
CHAPTER 04 지하철 10호선은 ‘라인 넘버 튼’입니다
V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일화 하나를 풀어보려 합니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안내방송이 나왔습니다. 영어 안내였습니다. “Welcome to Line Number…” 다음 단어가 들리는 순간 저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튼.’
처음에는 분명히 ‘텐(ten)’이라고 들어야 할 자리에서 ‘튼’이 들리니까 ‘무슨 새로운 노선이 생겼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들어봐도, 또 들어봐도 ‘라인 넘버 튼’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게 바로 영어의 ‘ten’을 중국식 발음으로 옮긴 결과였습니다. 중국어에는 영어의 짧은 ‘e(ɛ)’ 모음이 깔끔하게 대응되지 않다 보니 그 자리에 가장 가까운 ‘으(ə)’ 계열의 모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라인 넘버 튼.”
한 글자 차이지만, 외국인 승객의 머릿속에는 완전히 다른 노선이 그려집니다.
CHAPTER 05 내 이름 ‘JUNG YOUNGJAE’, 중국에서는 이렇게 외칩니다
‘텐’이 ‘튼’이 되는 일은 단어 단위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알파벳 한 글자씩 또박또박 부를 때조차도, 중국식 음가로 다시 한 번 변환됩니다. 호텔 체크인 데스크에서, 거래처 미팅에서, 어딘가에 등록을 할 때 제 영어 이름의 철자를 한 글자씩 불러야 하는 순간이 오면 이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학교에서 배운 또박또박한 영어식으로 ‘J - U - N - G’ 하고 읽으면? 어김없이 상대방의 표정에 ‘?’ 마크가 떠오릅니다. 그래서 저는 매번 제 영어 이름 ‘JUNG YOUNGJAE(정영재)’의 철자를 이렇게 외칩니다. 이렇게 해야만 단번에 찰떡같이 알아듣습니다.
SPELLING IN CHINA
가장 흥미로운 건 NG 두 글자가 한 덩어리로 묶여 ‘은지’로 발음된다는 점입니다. ‘엔(N), 지(G)’로 또박또박 끊어 부르면 못 알아듣는데, ‘은지’라고 한 호흡에 흘리듯 던지면 그제서야 “啊! OK!”하면서 끄덕여줍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지금은 거의 반사신경처럼 자동으로 튀어나옵니다.
그렇다면 알파벳 V는 어떨까요? 예상하셨다시피, 중국에서 V는 ‘브이’가 아니라 ‘웨이(wèi)’입니다. 결국 중국에서는 외래어 단어든, 사람 이름이든, 알파벳 한 글자조차도 ‘중국어의 입’을 한 번 통과해야만 비로소 들립니다.
CHAPTER 06 F 앞에서는 한국어도 갈팡질팡합니다
여기까지 듣다 보면 마치 중국어만 특이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어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어에는 F 발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단어를 사람마다, 시대마다 다르게 표기해왔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편의점 ‘Family Mart’입니다. 어떤 사람은 ‘훼밀리마트’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패밀리마트’라고 합니다. 후라이드치킨과 프라이드치킨, 화이팅과 파이팅, 휘트니스와 피트니스도 마찬가지입니다. F라는 한 음소를 한국인의 입은 두 가지 길로 우회해서 표현합니다. ‘ㅎ’ 계열로 도망가거나, ‘ㅍ’ 계열로 도망가거나.
결국 발음의 빈자리는 어떤 언어에나 존재합니다. 중국 사람들이 V를 ‘ㅇ’으로 메우는 것처럼, 한국 사람들은 F를 ‘ㅎ’ 또는 ‘ㅍ’으로 메우는 것뿐입니다. 서로의 입이 가진 한계를 알고 나면, 어색한 발음에 더 이상 웃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다정한 마음이 생깁니다.
외국에서의 삶은 결국 ‘없는 소리’를 발견하는 여정인지도 모릅니다.
볼보가 워월워가 되고, 텐이 튼이 되는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모국어가 가진 풍경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됩니다.